[CBC뉴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코엔 형제가 감독한 영화가 있다. 노인들의 매우 지루하고 다채롭지 못한 삶을 잘 다루고 있다. 젊은이를 위한 나라가 없는데 노인에게 돌아가 몫이 없다는 말이 제법 옳게 들린다.
또 하나 심금을 울리며 가슴을 후벼 파는 영화가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시간이 갈수록 어려지는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려진다.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반사 신경이 둔해지고 잘 노여워하고 쉽게 좌절한다. 벤자민 버튼은 노인은 인생에서 가장 어린 아기가 되는 시점이라는 점을 잘 포착한 듯하다. 역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눈이 풀려 의사전달을 잘 못하는 노인이나 오직 우는 것 외에는 자기 표현을 못하는 갓난애나 다를 바 없다.어린 아기에게는 부모의 정성과 성의가 작용한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불면 날아갈 새라 놓으면 다칠 새라 품안에 넣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장래의 희망이 뭐가 될 것이냐고 묻는 이유는 사실은 자신의 희망에 대한 부분이고 그 욕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늙은 사람들, 노인들은 생산이 없고 장래가 없다. 이들에게 미래는 죽음뿐이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망보다는 어른거리는 의식이다.
노인의 얼굴에 비치는 장명등, 검은 상복, 흰 머리띠 그리고 조화 등이다. 지금 열거해 봐도 하등의 희망이 없지 않는가?
그런 노인에게 밥이나 주고 또 밥이나 주고 잠이나 재워주고, 얼어 죽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또 보호해주고 , 그리고 우리는 그걸 ‘모신다’라고 한다.
모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오토경영이라는 점포 운영방식이 있다.오토경영이란 사업주나 가맹점 주가 영업장에서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알바생이나 점장을 내세워 영업을 하는 경영방식을 말한다.
우리가 적은 돈으로 창업할 수 있는 소규모 커피점, 피시방, 빵집 같은 업종이 대표적인 업종이다.이런 가게에 가보면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 카운트에 앉아있다.
나이로 보아 가게를 경영하기에는 너무 연소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이들은 사장님이 아니다.? 대개 점포의 업주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업주는 보이지 않는다. 업주가 없어도 돌아가기 때문에 오토경영이라고 부른다.하지만 이 오토경영은 노인에 대한 위상을 말해주는 실례이기도 하다. 노동 시장에서 노인의 존재감이 얼마나 무력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가를 단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주인 스스로 매장에 나타나는 것을 삼가는 실정이니 노인을 고용한다든가 늙은 사람을 점원으로 쓴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포개져 있다.
하다못해 주인이라 하더라도 노인이 점포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위축되는 이유는 노인의 출현 자체가 영업을 방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커피점이나 빵집 같은 데 서빙을 한다면 젊은이들은 부담감을 느끼고 그 점포에 다시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젊은이들은 또래가 서빙하는 물 좋은 곳으로 옮기게 되고 이런 악순환은 결국 노인을 인력시장에서 쫓아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젊은이들은 가정에서의 유교적 관습에 대한 부담감을 느껴 조금치라도 일탈의 순간을 느끼려고 커피숍이나 주점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이 여기서도 맞닥뜨리는 현실이 집과 같은 환경이라면 그들은 해방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은 노동시장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문제는 이런 관념이 일반 서비스업종으로도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의 서비스에 대해서는 친절· 불친절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부담이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다. 감정의 영역에서는 개선이 어렵다.
지금은 상당한 불경기이다. 이런 불경기에 사실은 알바나 점장을 고용할 이유도 없다. 점포를 차린 사람이 직접 경영을 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의 일자리도 다시 생긴 것이고 그야말로 인생 2기가 열린 것이다.
자신의 점포에 고개를 삐쭉 내밀고 돈지갑을 챙겨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오는 광경은 오토경영업체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결국 사람을 안 두고 직접 경영하면 인건비라도 따 먹을 수 있는 여건인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람을 고용하다보니 새는 곳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것이 결국 골목상권이나 소점포의 도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기의 알토란같은 자금으로 세운 업소를 출근하기는커녕 먼발치에서도 바라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내가 여생을 편히 보내려고 만든 땀의 집산물이 ‘딴 데’가 되는 것이다.
[데스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