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있다. 생활의 달인들은 그야말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치를 부여받고, 뽑히지 않았기 때문에 ‘훈장’을 받은 이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살아남은 승자이며 그래서 진정으로 강한 자이다. ‘생활의 달인’이 되기 위해선 어렵고도 쓰라린 과정들을 거쳐야만 했다.
육체노동을 통한 밥벌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위 ‘노가다’로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해 보면 알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다. 지금의 체제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생활의 달인이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달인을 찾아가면 항상 달인 흉내를 내며 달인 페이크를 하는 사람들이 먼저 화면에 들어온다. 우리는 그 분들보다 휠씬 못한 자질과 기능을 가진 ‘시다바리’ 신세다.
사람들은 시다바리부터 출발해 달인에 이를 수 있을까 하며 또 다시 절망한다.출발지점을 그곳으로 하고 따라오라고 하는데 생활의 달인과 경쟁해 봐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해보나마나한 게임 속에 자주 던져지는 심신과 생활을 보면서 무기력과 무능, 절망을 자각하게 된다. '생활의 달인' 세계에 입문해서 살아남을 수 있기에는 우리들은 너무 약하다.
몸으로 부딪쳐서 세상사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생활의 달인이다.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막 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있고, 냉장고를 들어도 그냥 무대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배달도 기술이 있어야 하고 포장도 큰 기술이다.특히 요리부문의 기술은 정말 하늘을 우러러 볼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며 여기까지는 엄두가 안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생활의 달인과 ‘나’는 거리가 멀고 육체노동의 길도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것도 제대로 써먹으려면 적어도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 좋은 사람도 10년은 걸리는 것이 기본이니 말이다.
생활의 달인을 통해서 어떤 육체노동의 세계든 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은 없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운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하방’이다. 시골로 내려가는 삶 말이다.
우리들이 얼핏 봤던 모든 허드렛일이 정교한 기술과 짜임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보다 쉽다고 여겨져 선택하는 것은 귀농이나 귀촌이다.
하지만 귀농과 귀촌 역시 결코 쉽지 않다. 귀농자의 3%만이 성공을 거두고 억대 자산을 까먹고도 미래가 확실치 않은 것이 귀농이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그냥 살면서 돈을 까먹는다는 생각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거나 그랬을 때 무엇으로 밥벌이를 할지 암담하다. 노가다나 막일 허드렛일도 생활의 달인을 보니 기술이 필요하고 기술이 있어야지만 이 세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농촌으로 가서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을 해도 투입된 자본의 반도 건지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는다. 호사하려고 농촌에 간 것도 귀농한 것도 아닌데 본전은커녕 빚만 지게 된다. 그래서 눈을 더 낮춘다.
자본을 안 까먹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말이다. 기술이 필요 없는 세계로 간다. 경비나 청소 같은 용역일이다.
하지만 그 용역일도 구하기 쉽지 않다. 여기도 경쟁률이 무척 세고 살아남기가 만만한 현장이 아니다.
이렇게 생활에 쫓기면서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삶이다.
기준계라는 말이 있다. 기준계는? 지각, 기억, 느낌 따위의 기준이 되는 체계를 말한다. 이 어려운 말을 꺼낸 이유는 지각, 기억, 느낌이 되는 체계가 너무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귀농의 실패, ‘생활의 달인’ 닮기의 어려움, 용역의 까다로움 등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기울어진 상태가 ‘기준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