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해지면 고루해지기 쉽다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검소함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견해로 느껴질 만하다.
공자가 검소함을 무조건 좋다고 치켜세우지 않고 이를 경계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검소함이 갖는 문제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검소하다는 것은 자칫하면 인색할 수 있으며 빡빡할 수 있다. 공자가 쓴 논어는 이렇듯 역설적인 화법들이 많다. 그냥 일반적인 도덕군자였다면 검소함을 무조건 칭송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검소함이 지닌 양면성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치를 따지거나 상황을 비쳐 봐도 공자가 천하를 철환하며 배운 처세술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공자의 역설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번 들여다보면 아주 많이 적용할 수 있다. 요즘 많은 자기 계발서가 나오고 처세술을 강조하는 책들이 나오지만 논어에 견주면 낫다고 할 수 없다.말 하나 하나가 머리에 쏙쏙 박힌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에 대입해도 역설은 들어맞는다. 공자는 ‘불어괴력난신’이라고 하여 이상한 힘이나 어지러운 말이나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공자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제자는 또 다시 비슷한 질문을 했다. 계로라는 제자는 다시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며 제자의 말에 답했다.
공자에게 재치를 바라거나 거룩한 철학을 받으려는 제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이 되는 답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공자는 이를 통해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줬다.
실천적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촌철살인한 역설은 계속된다. 말할 때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라는 말이나 충고를 하더라도 가려서 적당히 해야 한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글귀이다.
사람들은 에둘러 말하기를 좋아하고 또 어떤 때는 너무 넘치게 말을 많이 할 때가 있다. 말의 수위 조절을 잘 못하면 안 된다는 말을 공자는 하고자 했던 것이다.
도가 없을 때 말은 공손하게 하라는 말은 많은 위정자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도가 살아있는 나라는 직언을 불사하고 용감하게 나서 충고를 할 수 있지만 불의가 판치는 판국이라면 말을 잘못하면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공자는 말조차 하지 않는 세상을 무척 걱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정성을 다해 적극적인 ‘개입의 논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공자의 참여정신은 실제적이고 눈높이에 맞는 실천적인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군자는 작은 것을 알 수는 없으나 큰 것을 받을 수는 있다 소인은 큰 것을 받을 수는 없으나 작은 것을 알수는 있다.”라며 형편에 맞는 행동을 강조했다.
공자는 군자의 도리로 친척을 버리지 않고 한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완벽을 요구한다면 허물있는 사람은 참여로부터 멀어진다. 공자는 철저히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다.
공자는 늙어서 혈기가 이미 쇠했을 때 젊은 시대와 똑같이 이득을 취하려 하는 욕심을 부리지 마라고 충고한다. 이는 힘에 맞는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또 공자는 추구하는 길이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마라는 조언을 했다.
추구하는 길이 다르면 함께 도모하지 말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소극적인 도피의 말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실천적인 도를 중시한 사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는 추구하는 길이 같은 사람끼리 반드시 ‘도모’하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다.
시쳇말로 너무나 ‘쫄아서’ 비평이나 평가 혹은 불만마저도 없다면 그야말로 사회는 발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조차 없는 사람은 도울 방법이 없다는 말도 새겨볼 만 하다.
그 말이 비록 대상에게 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비판정신은 가져야 한다는 점을 공자는 간파했던 것이다.
공자는 능력에 맞는 사회적 참여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던 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