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역시 현명했다. 4.13총선은 첫째 '기성정치 심판'이다. 특히 오만한 친박과 친노를 심판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야당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제2당 추락이라는 철퇴를 맞았고, 더민주당은 수십 년 텃밭 호남에서 대참패라는 채찍을 맞았다.
새누리당은 골목대장의 "돌격" 구호에 "와" 함성 지르며 달려 나가는 동네 꼬마들을 연상시켰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라"는 한마디에 이한구를 돌격대장으로 우르르 달려 나가며 "유XX를 죽여라", "김○○이도 죽여 버려" 하는 광란에서 조무래기들의 전쟁 놀음이 떠오를 뿐, 국정을 책임진 집권당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고도 선거승리를 기대했을까. 무릎 꿇고 사과하면 '미워도 다시 한 번' 표를 줄 거라고 믿었는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핵심지지층마저 돌아선 것이 수도권 참패, 영남권 패배로 나타난 것이다.
더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친노패권이 '정체성 시비'로 비노와 호남정치세력을 쫓아내는 것을 본 호남민심은 녹색바람을 일으켜 더민주당을 참패시켰다.
새누리가 불모지 호남에서 2석을 얻었는데, 더민주는 텃밭 호남에서 겨우 3석을 얻는 참패를 당한 것이다.
친노 상징인 당대표가 2선으로 물러나고 외부인물을 내세워 '친노 밉상'을 공천 탈락시키는 등 '분칠'한 덕분에 수도권과 영남에서 일부 선전했지만, 정당지지율이 3위로 추락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
4.13총선은 둘째 '새로운 정치 주문'이다. 기득권에 안주해 온 집권당과 반사이익에 업혀온 야당의 양당구도를 깨트리고 3당 체제의 새로운 정치를 주문한 것이다.
어느 당도 과반수 확보가 어렵기에 다른 당의 도움을 얻기 위해 협상과 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해야하는 구도가 됐다.
현명한 국민들은 이번 총선에서 아주 의미 있는 두 가지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 하나는 여야당의 극한대립을 막을 수 있는 제3당을 탄생시킨 것이다. 국민의당은 호남이 기반이고, 중도세력과 호남세력이 엉거주춤 동거하는 형태이므로 향후 당의 노선과 정책을 정립하는데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그러나 정치이념과 경제정책에서 기존 양당의 중간쯤에 위치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야당은 반사이익으로 국민절반의 지지를 공짜로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확고한 국정비전과 정치력이 없는 정당은 뒤처지게 됐다.
특히 제3당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여야당은 '끝없는 마이웨이정치'를 할 수가 없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정치, 여야당간의 교섭과 설득과 타협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 하나는 거센 지역바람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김부겸, 전남에서 이정현, 전북에서 정운천 등이 불모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심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남은 여당, 호남은 야당'이라는 낡은 지역정당구도를 깨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정현 의원은 호남에서 새누리당으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지역바람에도 불구하고 당선시킬 사람은 반드시 시켜준다'는 새로운 정치역사를 만들게 됐다.
'비정상의 정상화'란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개혁대상에게 자주 쓴 문구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이 대통령과 정치권에 '정치의 정상화'를 주문했다.
그동안 정치가 정상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국회와 소통하지 않고 비난의 대상으로 여겼다. 여야당지도부를 만나지도 않으면서 국무회의나 청와대비서관회의에서 수시로 국회를 비난했다. 대통령이 정치의 중심이고 최종책임자인데도 말이다.
여당은 과반수 넘는 의석을 갖고도 야당에 끌려 다녔다. 청와대의 거수기노릇만 하고, 야당과의 협상도 능동적으로 하지 못했다. 여당은 국정의 절반을 책임져야하는데도 말이다.
야당은 대북정책과 경제정책에서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았으며, 세월호 등 민감한 사건에서 운동권의 주장만 대변하면서 반사이익에만 기대어왔다. 야당도 국정의 공동책임자인데도 말이다.
이제부터 진짜 정치력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회의 협조를 얻기가 더 어렵게 됐다.
그러나 북핵문제 등 국제정세가 긴박하고, 국가경제도 기업경영도 엄중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여야를 막론하고 자주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여당은 야당의 협조를 얻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2개의 야당과 선별 협상해가면서 국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할 뿐만 아니라, 2개의 야당이 공조해 밀어붙일 때는 국회선진화법을 무기로 방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2개의 야당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며 협조하는 정치력이 필요한 때이다. 선명성 경쟁도 필요하고 수권능력경쟁도 필요하겠지만, 국정을 마비시키는 경우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국민은 왜 과반수 정당을 만들지 않고 여러 정당에 의석을 나눠주었을까? 국정에 대한 책임도 골고루 묻겠다는 뜻이다. 각 정당은 '의석수만큼 국정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류재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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