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멈추니 땀이 느껴진다. 칼이 멈추니 내가 헐떡이는 소리가 비로소 들린다.
내 돌이 더 많이 놓일수록 피해가 큰 상황을 환격이라고 한다. 바둑 두는 분들은 환격에 걸리면 “너 이미 죽어있다” 라고 한다.
하나를 잡기 위해 들어갔는데 내 돌이 여러 개 작살나는 상황이 환격이다. 반대로 적이 나의 돌을 한 개 따는 순간 나는 적의 여러 개의 돌을 잡아내기도 한다.
환격을 더욱 간단히 설명하자면 상대편이 자신의 돌 하나를 잡게 놓아둔 뒤에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놓아서 상대편의 돌 여럿을 잡는 일이다.
바둑이란 게임에서는 큰 죄가 안되지만 이를 현실 생활에 적용한다면 잔인하다.환격은 일부러 사지로 들어가서 적의 다수를 사냥하려는 덫이다.
바둑 용어인 환격(우데까시)에 걸리면 못 빠져 나온다. 고도의 미끼에 걸려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피해를 주고 타격하기 위해 들어온 물 불 안 가리는 상대를 내 힘은 하나도 안들이고 잡는 고수의 사냥법이다. 환격은 도망갈 수 없고 빠져 나올 수 없다. 환격은 올가미의 지옥이다.
자기가 움직일수록 피해를 보는 상황에 빠진 것을 ‘환격의 피해’라고 본다면 그를 유도해 내 환격을 즐기는 것은 ‘환격의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 이런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환격이 세상살이의 가치 기준이 되고 있다. 피해를 보는 쪽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요즘 패러다임이 돼 버렸다. 피해자가 이기는 사회, 죄 받는 자가 정케 하는 사회가 바른 사회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환격의 미학만이 번득이고 ‘함정과 그물망의 논리’만이 삶의 위안이 되고 있다.
세상이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죄악의 최고라고 생각했고 사회적 부조리의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보다 더한 ‘환격의 사회’가 탄생했으니 말이다.
교도소를 탈옥한 지강원이 인질극을 벌이며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외치는 순간 , 그런 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해악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지강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수 십년 후인 오늘날 유전무죄나 무전유죄를 외치는 순수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죄라면 졌다는 것이다.
도둑도, 강도도 강간범도, 사기꾼도 모든 범죄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승패의 문제로 전도된 것이다. 환격이란 적과 적이 가장 근접한 상황에서 벌이는 사활의 수이다.
되치기나 먹여치기에서 내가 진 것 뿐이지 죄를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좀더 영악하고 신중했다면 승리를 거머쥐었을 수 있었을텐 데에 대한 아쉬움 뿐이다.
대치된 상황에서 진 나는 패자이다. 정교한 다음수를 못본 나는 패자이다.무전유죄를 외치기보다는 지뢰나 부비트랩을 어떻게 설치할까를 고민하는 편이 낫다. 이는 대한민국이 정글이 되었다는 혹은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탄일수 있다.
죄와 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출세가 같이 존재하고 죄가 궁극적으로 자유라는 역설까지 가능하게 한다.
죄 있는 곳에 명예가 가까이 있고 죄 있는 곳에 내가 하고자 했던 ‘목적’이 있다.죄를 생각하고 죄를 받고 죄를 사하고 이런 피드백으로 죄업이 정리됐던 시스템이 아주 다른 시스템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의 죄는 복수를 위한 죄이고, 복수의 단죄를 위한 죄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심사가 이르면 19일로 영장 청구 여부 결전이 임박했다. 증거인멸 우려와 공범과 형평성에 한수를 보고 두 전직 대통령 구속 부담으로 각자 또 한수를 읽고있다. ‘환격’이 피해든 쾌락이든.
지금 우리사회에서 도덕적 기능은 약화됐다. 소통이 줄어들고 절차나 제도가 무시되면서 과정이 없는 단죄에 대한 반발만 늘어가고 그런 기형아가 환격을 만들어낸다.
감옥에 있는 자가 승리자가 되는 사회ㅡ 이것이 이상사회가 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