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뉴스ㅣCBCNEWS = 김민철 기자]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양을 치는 소년이 심심풀이로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거짓말로 동네사람들을 속입니다.
이 소년은 마을 사람들이 초긴장 상태가 되어서 무기를 들고 자신을 구하러 오는 모습이 재밌어 여러 번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한답니다.
하지만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에는 동네사람들은 소년을 구하러 가지 않습니다.
결국 그 양은 늑대의 먹이 감이 되어 전부 먹히고 만다는 줄거리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여러 번 거짓말을 행하면 나중에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스토리는 평소 정직하지 않으면 결국은 큰 화를 당한다는 교훈으로 회자된답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자를 둘러싸고 언론의 난도질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더라’와 ‘뇌피셜’이 횡행하지만 이 한계를 제대로 짚어내는 언론은 드뭅니다.
조국 지명자에 대한 과잉된 정보량은 기억의 용량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보도 기준에서 팩트냐 소설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게감을 갖는 것은 얼마나 타격을 주고 얼마나 크게 흠집을 낼 수 있느냐 입니다.
너무 정보가 과잉이다 보니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매금으로 넘어온 정보는 ‘조국은 나쁘다’입니다. 이와 함께 대중들은 그 정보에서 양치기의 소년의 악의적 거짓말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정보는 묘한 성격이 있어서 0.1g의 불순물만 섞여도 양치기 거짓말 같은 상황이 됩니다.
유리한 쪽으로 마사지하는 낌새만 있어도 중립적 가치는 흔들리고 ‘편들기 찌라시’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언론이 견제와 비판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뿔달린 도깨비 형상으로 상징조작을 하고 있는데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대가는 후일 아마도 큰 부메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조국에 대한 정보는 공황 급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과잉생산이 역설적으로 정보에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매체는 조국에 대한 기사를 무려 하루에 10꼭지가 넘는 지면배치를 했다고 합니다.
과장되게 말하면 신문을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조국이라는 이름만 신물나게 보게된 상황속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신문 , B신문 , C신문 할 것 없이 조국 까기에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성도 없고 변별력도 없는 내용들은 극심한 피로감을 유발할 뿐입니다.
씌어져 있는 내용들이 팩트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점철돼 있을 뿐이며 진실을 담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보에 대한 두려움이나 일말의 책임감마저도 결여된 듯 합니다.
인격적인 측면이나 프라이버시 보호, 배려심 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부 언론의 조국 기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케 합니다.
키가 침대보다 길면 그만큼 잘라내고,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올라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조국에 대해 쏟아지는 글들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유일한 논리는 걸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협량함과 무관용이 미덕처럼 돼 조국을 공격하지 않으면 언론이 아니고 조국을 분석하지 않으면 지성인이 아니라는 강박까지 생겼습니다. ‘조국포비아’나 ‘조국안티’나 모두 거기서 거기인 듯 합니다.
언론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것은 일부 네티즌들입니다.
네티즌들은 언론들이 진실보도 보다는 한 방향으로 함몰돼 ‘조국까기’에만 여념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이래서 나온것이 '가짜뉴스아웃'과 '한국언론사망'입니다.
이는 진실을 이야기한 에밀졸라가 당시 프랑스 신문에 더 이상 글을 싣게 되지 못하자 한 행동과 비슷합니다.
‘가짜뉴스아웃이’나 ‘한국언론사망’은 에밀졸라가 신문에 글 싣는 것을 포기한 대신 팸플릿으로 제작해 캠페인을 벌인 상황과 일견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설로 표현할 수 있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유무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론이 할일은 마녀사냥도 아닙니다. 조국 지명자가 청문회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떻게 해명하는 지를 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양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