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조선이 담지 못한 ‘부용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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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조선이 담지 못한 ‘부용꽃’
  • 박현택 기자
  • 승인 2011.10.14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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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찌 이 땅에 아녀자로 태어나 이 작은 틀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던고. 죽어 다시 태어나면 저 너른 중원천지를 말 타고 달리는 남정네로 태어나리라.”

천재도 과하면 독이 되는 것인지, 조선 중기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은 그 독(毒)으로 얻은 빛난 대가로 오랏줄로 꽁꽁 묶여 냉랭한 별채에 갇히고 소외당했다. ‘난설헌’(다산책방 대표 김선식)은 이런 불우한 천재 허난설헌의 일생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으로서의 생과 여자로서의 생. 이 두가지 행로 어디에도 난설헌은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못했다. 남편이 햇빛 찬란한 양지밭과 같지 않았기에 여자로서의 생에 늘 잿빛 어둠이 길게 드리웠고, 시인으로서도 그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해 시는 늘 한줌의 그리움으로 애달팠다.

소설 속에는 27년 짧은 생 동안 명주실을 뽑아내듯 써내려간 난설헌의 시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종이와 붓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써 내려간 시는 오직 여인에게만 한없이 가혹했던?조선을 향한 부르짖음처럼 여겨졌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 익히도록 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가 달갑지 않았던 시어머니. 8세 때 이미 신동으로 소문난 아내 곁에서 별다른 재기 없는 자신을 자학하며 바깥으로 돌기만 하는 통 좁은 남편. 어깃장으로 서로 할퀴는 부부사이. 애뜻함이든 미움이든 눈길은 어긋나고, 난설헌의 진심은 반사되고 부서지기만 했다.

명주실을 뽑아내듯 영혼의 부르짖음으로 써내려갔던 시

난설헌은 꽃다운 젊은 시절 15세 조혼을 한 뒤 엄격한 법도에 눌려 일생 문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더해 시집살이의 고됨은 차라리 사회활동이 자유롭고 마음껏 자연과 창(唱)과 문(文)을 벗 삼아 사는 기녀의 삶이 낫겠다 싶다.
 
사간헌의 영수인 대사간인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도 부족해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차례로 잃었다. 살림은 뒷전이고 서책이나 팔랑거리며 기녀들이나 하는 시나 나불대는 어미에게 물들 수 있다는 시어미의 엄혹한 규제 속에 제 자식 한 번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난설헌이었다. 이때의 슬픔을 그녀는 ‘곡자(哭子)’’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이여

두 무덤이 마주보고 있구나

백양나무에 소슬한 바람 불고

도깨비불은 무덤가 나무 밝히네

종이돈 살라 너희 혼을 부르고

정화수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

너희 넋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지니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잘 크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고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슬퍼한다

- 허난설헌의 시 ‘곡자(哭子)’ -
 

두 손을 휘저어 붙잡으려 하면 조금 전까지 온기로 느껴지던 아이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오지만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새나가버리는 아이들이 그미의 가슴에 사무친다. 후드득,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는 눈을 뜨고 일어나 서안을 끌어당긴다. 어느새 먹물이 말라버린 붓은 빗금 한 획도 그리지 못하고 마른다. 물처럼 새고, 먹물같이 사위는 것들...뜨겁고도 세찬 한숨이 토해진다. -소설 ‘난설헌’ 중

 

 

 

 

 

소설 ‘난설헌’을 통해 다시 태어난 허난설헌. 저자 최문희 씨는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히며 마음에 박혀버린 허난설헌을 불러냈다. 저자는 작품을 쓰는 내내 난설헌과 소통했던 날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고 고백했다. 귓전에 속삭이던 말들이 오롯이 한 권의 소설로 남았다고 전했다. 저자는 ‘난설헌’으로 혼불문학상을 탔다.

난설헌의 세 가지 한(恨)…여자, 조선, 그리고 남편의 아내

난설헌의 너무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닫힌 세상이었던 조선은 배겨나지 못한 듯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염하고 방만한 백일홍의 이미지와 단아하고 청초한 난설헌의 모습이 자주 오버랩된다. 껍질이 없어 미끄러운 나무 백일홍은 있는 그대로 발가벗고 서 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이름이 없는 여성이란 뜻인지. 칠거지악으로 겹겹이 억압하고 수 겹의 속곳으로 정절을 강요당하는 조선의 여인과 백일홍이 대비된다. 아련히 백일홍을 바라보는 난설헌의 눈빛이 선연하다. 규제와 억제된 삶의 한 모서리를 허물고 싶은 눈빛이다.

허난설헌은 어렸을 때 이름이 초희였다. 그녀는 ‘감우(感遇)’라는 시를 짓고 ‘허난설헌’이라는 당호를 지었다.

“난설헌이라…참으로 대단한 자기애를 지녔구나. 자고로 남자나 여자나 자아가 강하면 외로운 법…아직은 어린 나이인데 아름다운 난초의 초췌해지는 추이를 그린 것은 너무 조숙함이 아닌가.”

이름 없는 여인으로 살아야 마땅한 시대에 과도한 자아의식과 자기애를 가지고 성장했으니, 난설헌의 일생은 불행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독자들은 최문희의 ‘난설헌’을 읽다보면 후드득 자목련이 붉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민요의 슬픈 가락이 떠오르고, 고조 없는 시 한 수를 읊고 싶어질 수도. 가이 없는 보랏빛 절망을 만날 것이다.

한편 제 1회 혼불문학상 대상의 영예를 얻은 최문희 씨는 77살 늦깎이 작가임에도 힘찬 필력과 뛰어난 묘사 기법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다룬 소설 ‘붉은 빗방울’로 정통적인 묘사 기법을 통해 허난설헌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1회 혼불 문학상 대상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범신씨는 “디테일하고 성실하게 이야기의 육체를 만들어냈다.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여자의 삶을 매우 꼼꼼하게 바느질한 느낌이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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