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NEWSㅣ씨비씨뉴스] 어느 때부터인지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함정과 그물망의 논리’만이 삶의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죄악의 최고라고 생각했고 사회적 부조리의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보다 더한 ‘사회’가 탄생했으니 말입니다.
교도소를 탈옥한 지강원이 인질극을 벌이며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외치는 순간, 그런 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해악인줄로 알았는데.
하지만 지강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수 십년 후인 오늘날 유전무죄나 무전유죄를 외치는 ‘순수파’(純粹派)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죄라면 ‘졌다는’ 것입니다.
도둑도, 강도도, 사기꾼도 모든 범죄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승패의 문제’로 전도된 것입니다.
되치기나 먹여치기에서 내가 진 것 뿐이지 죄를 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영악하고 신중했다면 승리를 거머쥐었을 수 있었을 텐 데에 대한 아쉬움뿐입니다.
대치된 상황에서 진 나는 패자입니다. 정교한 다음수를 못본 나는 패자입니다.
‘졌잘싸’ 를 외치기보다는 함정을 어떻게 설치할까를 고민하는 편이 낫습니다.
죄와 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출세가 같이 존재하고 죄가 궁극적으로 ‘훈장’이라는 역설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죄 있는 곳에 명예가 가까이 있고 죄 있는 곳에 내가 하고자 했던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생각하고 죄를 받고 죄를 사하고 이런 피드백으로 죄업이 정리됐던 시스템이 아주 다른 시스템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의 죄는 복수를 위한 죄이고, 복수의 단죄를 위한 죄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도덕적 기능은 약화됐습니다.
소통이 줄어들고 절차나 제도가 무시되면서 과정이 없는 단죄에 대한 반발만 늘어가고 그런 기형적 상황은 무리수를 남발합니다.
총선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당들은 인재영입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각 정당 간 사활의 건 수 싸움을 전개 중이다. ‘여기’ ‘지금’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태도 뿐입니다.
이번 총선에선 ‘졌잘싸’한 인물을 보고 싶다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까요.
여야가 좀 우당탕탕이 있어도, 우악스러워도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것 같은 기세입니다.
[진행ㅣCBC뉴스 = 권오성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