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트럼프돌풍'을 일으키는 미국의 변화에 주목해야

2016-05-11     류재택 칼럼니스트 대통령연구소장·정치학박사

영화 '관상'의 끝부분에 한명회(김의성 분)가 관상가 김내경(송강호 분)을 찾아온다. "관상을 그리 잘 보는 분이 어찌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지 못했소?" 

관상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한다. "파도는 보았지만 바람을 보지 못했소.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되자 미국의 주류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NYT는 "링컨의 정당이 어둠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썼고, 어떤 정치평론가는 "160년 공화당의 자살"이라고 비평할 정도다.

그러나 그동안 비주류였던 백인과 경제적 약자들은 트럼프에 열광하고 있다. 미국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파도'일 뿐, 그 '파도'를 만들어내는 '바람'은 저소득․저학력 백인들의 분노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뺏는 유색인종에 분노하며 자유이민정책에 반대하고, 그동안 묵묵히 참고 지지해왔던 미국의 세계경찰국가 역할도 반대하며 자유무역협정에도 반대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형성된 국제정치질서(UN중심의 국제평화체제)와 국제경제질서(WTO 중심의 자유무역체제)에 더 이상 박수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는 '한국의 안보무임승차'와 '핵무장' 등 국제평화질서를 흔드는 발언을 거침없이 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FTA)을 "완벽하고 총체적인 재앙"이라고 하면서 당선되면 무효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의 샌더스도 마찬가지로 "FTA로 미국은 손해만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트럼프나 샌더스의 인기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미국 백인사회의 분노의 표출이므로 이런 변화는 트럼프·샌더스가 아니더라도 향후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다 트럼프는 당선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3월 9일자 칼럼에서 "트럼프돌풍을 눈여겨 봐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돌풍은 미국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미국민의 열망의 분출이므로 기성정치에 물들지 않은 아웃사이더가 오히려 잘 다듬어진 기성정치를 압도할 가능성은 아주 크다.

우리도 2002년 기성정치를 공격하면서 "반미면 어떠냐"는 막말의 노무현이 당선가능성 90%의 잘 다듬어진 이회창을 꺾고 당선된 사례가 있지만, 미국에서는 "워싱턴을 과감하게(drastic) 바꾸겠다"고 주장한 아웃사이더 카터가 곧바로 백악관에 입성한 이래 정치경험 없는 신인이 정치경력 화려한 거물정치인을 꺾고 당선된 사례는 아주 많다. 

더욱이 미국에서도 최근 8~12년 주기의 공화당-민주당 간 정권교체가 추세를 이루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미FTA가 파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1977년 카터대통령도 주한미군철수를 추진했지만, 미국의회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미국은 대통령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의회가 결정권을 갖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윌슨대통령은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고서도 '고립주의'를 고수한 의회의 반대로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심이 변한다면 미국도 현재처럼 세계경찰국가 역할을 계속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으로 유엔중시정책과 군사동맹이 위기를 겪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정책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이제 후보경선이 끝나면 대통령선거일까지 5개월여 기간에 해리티지재단과 자유기업원 등 공화당 싱크탱크들은 트럼프의 공약을 구체화할 것이고, 부루킹스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싱크탱크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정책을 다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트럼프만 볼 게 아니라 트럼프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의 변화바람을 읽으면서 대선이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혈맹'이다.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한국보다 많은 각 3만5천, 5만3천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혈맹이라 하지 않는다. 

이들은 2차 대전에서 미군과 싸웠던 패전국이다. 그러나 미군은 6·25때 한국군과 함께 싸웠고, 월남전에서도 함께 피를 흘렸기에 '혈맹'이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주한미군은 미국의 이익을 태평양 서쪽 끝까지 확장하여 실현하고 있는 최전방의 군대다. 

이런 전략적 가치를 제외하더라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 미국주둔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고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이 미국의회에서 증언한 바 있다. 

이처럼 미국에도 큰 이익이 되는 주한미군을 마치 한국에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트럼프의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군철수는 금방 되지 않겠지만, 현재 한미당국이 중점추진 중인 사드 배치, 첨단무기 도입과 기술이전,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 등 북핵 대응책의 많은 부분에서 갈등과 난항이 예상된다.

또 한미FTA도 재협상을 요구받을 수 있고,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도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근본적으로 기업인이므로 '미국의 이익'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논의된다면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한미FTA에 반대했던 오바마도 대통령이 된 후에 적극 추진한 바 있다.

우리가 미국에 강조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한국은 유교전통국가 중에서 기독교전통의 자유민주정치와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성공시킨 최초의 국가이고, 2차 대전 후의 신생독립국 중에서 최초로 원조를 주는 국가로 성장한 나라다. 

한국의 정치적 성공으로 미국은 "대통령제는 미국에서만 유효한 제도"라는 정치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할 근거를 얻었고, 한국의 경제적 성공으로 "주변부국가는 중심부국가의 수탈대상일 뿐 절대로 중심부국가가 될 수 없다"는 종속이론을 반박할 증거를 얻게 되었다. 

이처럼 작지만 성공한 나라 한국이 미국의 군사동맹국으로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고, 자유무역으로 미국과 공생·공영하는 국가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지금 정부와 기업, 학계와 연구소, 언론 등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미국의 싱크탱크들과 대화하면서 잘못된 인식을 설득하여 바로잡아야 할 때다. 

그런데 4.13총선의 폭풍으로 넋을 잃은 정부가 '트럼프돌풍'만 지켜보면서 그 파도를 일으키는 미국의 변화바람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류재택 칼럼]

<칼럼니스트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