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광석화'

2018-04-09     이수형 기자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다고 한다. 음양의 조화 속에서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사람이 살고 있다. 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본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국한해 이야기를 전개 시켜보면 변한 자와 변하지 않은 자,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변화에 대한 가치관이 세계관이다. 앎과 모름이 거기에 있고 수구와 보수가 거기에 있다. 역사를 강물로 비교해 보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낮은 곳에 있는 물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다.

흐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천의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현상이고 이것이 우주의 원리이다. 

물론 역류라 하여 흔치 않은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변화 안에 밝음과 어둠도 있고 왼쪽과 오른쪽도 존재한다. 

변화를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그 세상이 밝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둡게 느껴지기도 한다.더 나아가 진리관이나 정의까지도 변화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변한 세계가 좋게 느껴진다면 정의로운 세계이고 살만한 세상이다. 변한 세계가 나쁘게 느껴진다면 그 세계는 내가 살만한 세상이 아닌 세상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도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를 통해 인간은 발전해 왔고 역사는 이어져 왔다.

심지어 참과 거짓도 변화 속에서는 상대적 관념이 된다. 참은 변화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질까.거짓은 변화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질까.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변화하고 있는 것에서 홀로 뒤떨어져 참과 거짓을 운운하고 정의와 불의를 운운하는 것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합당한 자세인가가 질문으로 제기될 수 있다.

정의없는 실력은 폭력이고 실력 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이 있다. 변화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노정한 프로세스이다. 

변화를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의식하는 이유는 변화가 미래의 삶에 연결돼 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변화의 가치를 가지려면 조화로워야 한다.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다 멸망한 사례가 바벨탑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어리석다 하겠다. 정의는 바벨탑식으로 쌓게 하지 않고 힘의 남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것이 제힘을 믿고 까불다가 더 큰 적이나 더 위험한 모험을 하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정의는 오만하게 쭉쭉 자라날 소지가 있는 역사적 인간에 대한 제어 기능을 갖고 있다.

힘의 남용이 멸망을 빨리 부르고 힘을 엉뚱한 곳에 소진하게 한다. 제어 못하는 힘은 큰 적이다. 발전의 적이고 조화의 적이다. 

비대하게 한 기능만 발달하거나 한쪽으로만 치우쳐 큰다면 지탱이 어렵다.변화를 긍정하고 변화 속에 몸을 맡기면서 변화를 잘 타야 한다. 새시대라는 것은 변화한 세상을 이른다.

보수적이고 고착화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늦다. 4월 남북정상회담이 기대된다. 그때 대한민국은 많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는 광속도이다. 자고 나면 변화했다. 빠르다고 생각할 때 세상은 전광석화처럼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