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느 성장 서사 '야호'…무대의 크기가 바뀐 자리에서 다시 묻는 관계의 가치에 대한 성찰

2026-10-07     심우일 기자
리센느.

[CBC뉴스] 화보 촬영장에서 리센느 멤버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을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서진이 짧게 말했다. "너네 떴잖아, 눈치 안 봐도 돼." 지난 2일 밤 SBS 예능 무엇이든 해줄지니 - 비서진에 리센느가 'my 스타'로 출연한 날의 한 장면이다. 현장은 웃음으로 넘어갔지만, 이 짧은 대사에는 한 그룹이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마주할 선택이 함께 담겨 있었다.

'떴다'는 말은 연예계에서 단순한 인기 상승 이상의 뜻을 갖는다. 위치가 바뀌었다는 선언이고, 그 위치에 맞게 주변과의 관계를 다시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처럼 쓰이기도 한다. 

눈치를 거둬도 된다는 말은 그 허락을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건넨 표현이다. 선배가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격려로서는 틀린 데가 없다. 

다만 그 말이 나오기 직전까지 리센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따로 볼 필요가 있다. 멤버들은 스태프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이미 바뀐 위치를 실감하기보다, 이전의 습관대로 현장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는 같은 방송 안에 실마리가 있었다. 리센느는 데뷔 초 무대에 서기 위해 초등학교 운동회와 주민센터 무대까지 찾아다녔던 시절을 털어놓았다. 음향도 조명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노래하려면, 무대를 내어준 사람과 객석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런 무대에서 아이돌은 보여주는 사람이기 전에 부탁하는 사람이다. 한 번의 공연이 다음 섭외로 이어질지는 실력만큼이나 그 자리에서 맺은 관계에 달려 있다. 눈치는 그 시간을 지나며 몸에 붙은 생존 감각에 가깝다.

지금 리센느의 자리는 그때와 다르다. 방송은 원이, 리브, 미나미, 메이, 제나 다섯 멤버를 대세 걸그룹으로 소개했고, 스케줄이 몰리는 근황도 함께 전했다. 운동회 무대를 찾아다니던 그룹이 이제는 찾아오는 일정을 고르는 쪽에 섰다. 위치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위치가 바뀔 때 관계도 함께 바뀌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리센느.

비서진이라는 프로그램의 형식 자체가 이 질문과 맞닿아 있다. 경력 수십 년의 배우 두 사람이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의 매니저가 된다. 연예계의 오랜 위계를 일부러 뒤집는 구성이다. 이서진과 김광규는 야외 광고 촬영장과 화보 현장을 따라다니며 우산을 받쳐 들고, 음료를 건네고, 벌레 기피제까지 챙겼다. 

미나미의 유행어와 춤을 낯설어하면서도 수발은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언어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세대 사이에서도, 곁을 지키는 행동만으로 관계는 성립했다. 위계를 뒤집은 자리에서 오히려 관계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정산 이야기는 이 구도에 또 다른 층을 더했다. 김광규가 정산을 받아봤느냐고 묻자 메이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대세라는 수식어와 정산 이전이라는 현실이 한 화면 안에 나란히 놓였다. 아이돌 산업에서는 데뷔와 활동에 들어간 비용을 먼저 회수한 뒤 정산이 시작되는 구조가 일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대가 늘고 이름이 알려져도 그것이 곧바로 멤버 개인의 몫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리센느의 계약 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인기와 보상 사이의 시차는 이 산업에서 데뷔한 거의 모든 그룹이 겪는 시간이다.

이서진의 조언은 그 시차를 지나는 후배에게 건네는 현실론이었다.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허튼 데 쓰지 말라는 말, 돈을 많이 벌면 행복은 따라온다는 말이 이어졌다. 원이가 "근데 돈이 다일까요?"라고 되묻자 이서진은 "다야"라고 잘라 말했다. 예능의 과장이 섞인 문답이었고, 수십 년간 이 업계의 부침을 지켜본 선배가 일부러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그 말 자체가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보상 없이 버티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위태로운지를 아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답을 촬영장에서 스태프를 살피던 장면 옆에 놓으면 다른 결이 보인다. 정산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리센느가 지나온 길에는 이미 쌓인 것이 있다. 운동회 무대를 내어준 사람들, 주민센터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촬영장 한편에서 조명과 의상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산서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런데 작은 무대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는 길을 실제로 이어준 것은 그런 관계였다. 숫자로 오는 보상과 숫자로 남지 않는 관계는 서로 다른 장부에 적힌다. 

앞의 장부가 아직 비어 있는 시기에 뒤의 장부가 먼저 채워진다는 점이 이 시기 아이돌의 역설이다.

인기가 오른 뒤에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그룹마다 다르게 갈린다. 

정점에 오른 뒤 주변을 정리하는 쪽을 택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의 관계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위치가 바뀌면 감당해야 할 일도, 지켜야 할 경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눈치를 거두라는 선배의 조언은 그 경계를 스스로 세우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모든 사람의 표정을 다 읽으며 버티는 방식은 오래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리센느가 방송에서 보여준 것은 아직 그 습관을 버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떴다는 말을 듣고도 먼저 스태프를 살피고, 돈이 다라는 단언 앞에서 정말 그러냐고 되묻는 태도다. 

둘 다 계산된 연출이라기보다, 운동회 무대에서부터 몸에 익힌 감각이 예능의 틀을 뚫고 나온 순간에 가까워 보였다.

떴으니 눈치 보지 말라는 말은 후배를 위한 농담이었다. 돈이 다냐는 원이의 되물음은 웃음 속에 묻혔다. 

두 장면은 같은 날 같은 방송에서 지나갔지만, 서로 다른 질문을 남긴다. 위치가 바뀐 뒤에도 처음의 관계를 기억하는 일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 기억이 앞으로의 활동에서 어떤 형태로 남을지다. 정산서가 채워지는 날이 오면 리센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놓게 될 것이다.

성장 서사는 대개 무대의 크기와 순위의 변화로 기록된다. 

그러나 한 그룹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만큼, 올라가는 동안 누구와 함께였는지도 그 서사를 이루는 한 축이다. 

운동회 무대와 주민센터 무대에서 시작된 리센느의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관계의 장부 역시 닫히지 않았다. 그 장부에 어떤 이름들이 끝까지 남아 있을지가 리센느 성장 서사의 다음 장을 가늠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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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BC뉴스ㅣCBCNEWS 심우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