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뉴스]너바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우리말로는 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열반이든 해탈이든 최고로 행복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바나는 인간이 함부로 넘보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은 불교가 아닌 곳에서 드러났다. 세계적인 록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행복한 열반을 못했다.
열반과 해탈, 적멸로 해석되는 궁극의 목표에 감히 도전장을 냈지만 '열반'에 들지 못했다.
너바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인간 누구도 갈 수 없는 세계에 너무 쉽게 접근한 것이 커트 코베인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소박한 꿈을 꾸면서도, 인기를 얻기 싫어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는 웅대해졌고 유명해 졌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다.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며 득도하는 것이다.
서양청년은 동양의 꿈으로 너바나를 이해했을 것이다.
너바나는 흥분제나 각성제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커트 코베인은 ‘너바나’를 짊머지고 다녔지만 현실에 좌절했다.
한 이름을 가지려면 그 이름에 도달할 수 있는 채비는 있어야지 감당할 수 있다.
이름값 하기가 결코 쉬운 세상이 아니다.
이름만 거창하게 지어놓고 이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대항하다 희생당한 이가 커트 코베인이다. 너바나라는 이름이 어찌보면 큰 재앙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음악세계나 세계관이 이와 유사하게 가려면 그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커트 코베인의 너바나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너바나는 어쿠스틱 기타로 처리한다고 보여지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오하고 광대하고 무변한 변화의 세계를 알기에는 ‘너바나들’은 너무 유약했다. 그리고 무지했다.
이는 최고의 경지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물질로 마치 최고의 경지에 이르를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다. 물론 물질만능시대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물질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진리이다. 돈이 안 되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세상이다.
돈으로 낭패를 치러봤다면 재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돈과 성공을 거머쥐면 그는 인생에서 성공한 멘토이다. 이런 사람들이 처세의 너바나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앙받는다.
돈 못벌고 무능한 사람들은 마땅히 독설과 힐링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그래서 서점가에서는 여전히 독설,힐링의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서점가에 범람하는 ‘독설과 힐링’에는 개인이 감당해야할 고통만 강조되고 있다.
사회는 원래 비정하고 세상은 자비롭지 않다는 점만 강조된다.
무능한 개인이 사회가 가진 정글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 죄라고 질타한다.
한 자기계발서에서는 용서하지 마라는 말이 등장한다. 실패의 주홍글씨가 자주 등장한다. 실패했다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 영원히 재기할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없다.
세상은 살벌한데 너는 그럴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다는 말이 그 독설의 주제이다. ‘혹사의 생활화’와 ‘스트레스의 고마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 책의 주제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인간은 회사형 인간일 뿐이고 결혼은 제2의 전쟁터일 뿐이라는 논리가 횡행한다.
한 줄도 이 사회를 변화시켜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꾸자는 말은 없다. 타락한 사회는 견고하다는 것이 독설과 힐링의 복음이다.
'가짜 경지', 개인적인 해결책이 사회의 시스템보다 우위에 있는한 그 사회는 후진(後進) 사회이다.
데스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