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NEWSㅣ씨비씨뉴스] 광화문 삼백만명 , 서초동 이백만명 합쳐서 ‘오백만’명이다. 숫자가 많아 질수록 ‘조국의 시대’는 더욱 강화됩니다.
서울시 인구의 반이 닷새 간격으로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극과 극의 견해차를 보였습니다.
협량이 미덕이 되는 상황에서는 속이 좁을수록 현명하고 영악할수록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깐깐한 것이 미덕이고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응징해야 합니다.
협량함의 특징은 이름을 바르게 부르지 않습니다. 뜻을 곡해하기 위해서는 이름과 의미가 달라야 합니다.
손님이 실수를 하면 ‘우리’는 경사입니다. 상대방 선수가 똥볼을 차면 ‘우리’에게는 찬스입니다.
정말 정치도 좁고 사회도 좁고 문화도 좁습니다. 통로가 너무 좁아서 숨이 막히는데도 그 길로 계속 갑니다. 협애한 길을 걸으니 항상 위험합니다. 좁고 위험한 길을 가는 행보에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통큰이라는 이름은 치킨에서나 찾아야 할 듯합니다.
좁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친조국 반조국 운동을 하러 거리에 나온 오백만 시민에 대해 시선이 곱지 만은 않습니다. 벌써부터 소는 누가 키우냐는 ‘반문’이 빗발칩니다.
소 키우는 사람에 대한 부재를 걱정하는 것이 틀리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 키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소 키우자는 우국충정을 말하고 화해를 권고하지만 그 ‘언어’조차도 증오와 환멸의 언어입니다. 공동체를 나누려는 나이프 같습니다.
하지만 광장에 있고자 하는 ‘의지’를 함부로 재단에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중우’(衆愚)로 바라볼 자격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남북의 협량함은 한반도를 긴장상태로 몰아넣고 있고, 불통과 독선으로 나타난 강남북의 협량함은 국민을 힘들게 합니다.
집단적인 협량함이 세상을 부실로 몰아넣고 민생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며 미래를 깎아 먹고 있습니다.
협량함이 협량함을 복제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협량함’을 택했습니다.
협량함이 지속될수록 미래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협량함의 대가로 현재보다 미래에서 매우 답답한 상황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움직일수록 손목을 조여오는 형구인 수갑처럼 말입니다.
[진행ㅣCBC뉴스 = 홍수연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