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뉴스] 한국을 떠나 전 세계에 퍼져 사는 재외동포는 무려 730만 명.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22일 설날 저녁 방송되는 <이슈 PICK 쌤과 함께>는 이진영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장을 초대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작인 120년 전 인천과 하와이를 집중 조명한다.
지구촌 한인과 공공외교 전문가인 이진영 교수의 이야기는 대한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와 대기근에 시달리던 121명이 새 삶을 찾아 하와이로 향했다. 이들 중 일본 나가사키에서 이뤄진 신체검사에 통과한 이민 1진 102명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이민사,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이 교수는 “하와이 이민은 국가가 허락한 첫 근대 이민이지만, 전형적인 기획 이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최고 인기 향신료 설탕의 수요가 급증하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선 대규모 노동자가 필요했는데,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한인의 노동 이민을 위해 대한제국 고종 황제를 만나 설득한 것. 이 교수는 “하와이 이민은 농장주의 이익과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열망이 만나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난 하와이 이민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낯선 환경과 문화, 고된 노동과 언어 소통의 문제를 딛고 그들은 하와이에서 살아남았다. 이 교수는 한인들이 목걸이처럼 걸고 다닌 번호표 ‘방고’를 소개했는데, 개그맨 이수지는 “새벽 6시부터 10시간을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사람을 이름도 아니고 숫자로 부르다니 얼마나 힘들고 수치스러웠을까”라고 말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후 1905년까지 하와이로 건너온 한인 이민자는 모두 7천여 명.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들은 조국을 향한 사랑과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은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치는 한편,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되며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교수는 ‘사진 신부’를 소개하며, 이들이 하와이 한인 사회의 변화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강조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은 대부분 독신 남성. 결국 아내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사진을 보냈고, 그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들이 바로 ‘사진 신부’다. 이민자들의 생활 안정과 2세 교육, 한인 공동체 형성을 위해 노력한 사진 신부들은 쌀 한 숟가락을 아끼는 등 악착같이 자금을 모아 무려 300만 달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며 독립에 힘을 보탰다. 사진 신부들이 구심점이 된 하와이 이민 1세대의 고국 사랑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고, 이민 1.5세대부터 후손들은 미국 주류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강의를 경청하던 개그맨 유민상은 “역시 어머니의 힘은 대단하다”며 감동했고, 방송인 홍석천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줬던 동포들을 잊어선 안 된다”며 “재외동포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것 같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이 교수는 “저출산, 인구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한 우리 상황에서 이제는 재외동포를 바라보는 시선을 전략적으로 바꿔야 할 때”라고 주장했는데.
120년 전 조국을 떠난 망향의 애달픔을 애국으로 승화한 하와이 이민 1세대 이야기. <이슈픽 쌤과 함께> 설 기획 ‘120년 전의 디아스포라, 하와이로 간 사람들’은 1월 22일(일) 설날 저녁 7시 10분 KBS 1TV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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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C뉴스ㅣCBCNEWS 박은철 기자 press@cbc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