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뉴스] 한국사 최대 라이벌, 김구와 이승만.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자신이 머물던 서울 종로의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네 발의 총탄을 맞고 향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열흘간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백만여 명의 인파가 참석하는 등 그의 죽음에 온 국민이 비통에 잠겼다.
이후 김구의 묘소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참배 행렬에 이승만 대통령은 위기감을 느낀다. 김구의 추모식과 묘소 참배를 막고, 독립운동 기록이 담긴 '백범일지'를 금서로 취급하는 등 김구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는데.
죽은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김구가 묻힌 효창공원. 그곳은 이미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의 정쟁 무대였다. 효창공원에 담긴 한국사 최대 라이벌 두 거물의 정치사. '역사저널 그날' 394회 <산 자들의 정치 조선왕릉④ 김구, 효창원에 묻히다> 편에서 알아본다.
▶ 김구, 삼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시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같은 해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처단하는 등 일제에 큰 충격을 안긴 윤봉길.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암살을 시도한 백정기. 1946년, 김구는 일본에 있는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삼의사의 유해 봉환을 부탁하고, 6월 15일 조선해방자호에 실려 온 삼의사 유해는 효창공원에 묻힌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을 위해 힘쓴 김구. 그는 어째서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가의 묘지로 선택했을까? 일본의 비협조로 난관에 봉착했던 윤봉길 의사의 유해 수습은 어떻게 가능 했을까? 김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 과정, 그들이 묻힌 효창공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본다.
▶ 정조의 애틋한 사랑이 어린 곳, 효창원
본래 ‘효창원’이라는 이름의 문효세자 묘지였던 효창공원. 조선 22대 왕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문효세자는 정조가 31살에 낳은 늦둥이이자 장자이며 오랜 사랑의 결실이었다. 문효세자가 5살에 홍역으로 죽고, 그로부터 4달 후 의빈 성씨마저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자, 궁과 가까운 곳에 효창원을 조성한 정조는 두 모자를 서로의 곁에 묻어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통해, 그 어떤 왕보다 왕릉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조선 최고의 정치 군주, 정조.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만든 효창원에 담긴 애틋한 사랑은 일제강점기와 근현대 시기를 거치며 다양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 공간이 된다. 정조의 가족애로부터 시작된 효창원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알아본다.
▶ 효창원 수난사, 골프장에서 효창운동장까지
용산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군 주둔지 및 유곽이 자리하는 등 수모를 겪었던 효창원. 심지어 1921년 6월 일제는 철도 호텔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왕실 묘역인 효창원에 골프장을 개장한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담긴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으로서 효창원의 역사는 어땠을까? 자칭 ‘세리 키즈’ 최예지 골퍼와 함께 골프의 자세부터 효창원 골프장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한다.
골프장 이후로도 일제에 의해 효창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효창운동장이 조성되어 제2회 아시안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등 시대의 흐름 따라 잇따른 변화를 겪는 효창공원. 겹겹이 쌓인 역사가 압축되어 담긴 공간, 효창공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1월 22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394회 <산 자들의 정치 조선왕릉④ 김구, 효창원에 묻히다> 편에서 만나본다.
▶한번에 끝 - 단박제보
▶비디오 글로 만드는 '비글톡'
CBC뉴스ㅣCBCNEWS 박은철 기자 press@cbci.co.kr